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별세|향년 91세·김영삼 최측근·나이 학력 고향·6선 국회의원·부인 원영일·빈소 발인
관련 영상: YTN이 2015년 보도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상도동계 인물들. 영상은 2026년 별세 속보가 아닌 당시 역사 기록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6선 국회의원을 지낸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2026년 10월 24일 별세했다. 향년 91세다. 1960년 4·19혁명부터 민주화운동, 문민정부 출범까지 한국 현대정치사의 굵직한 장면을 함께했던 인물이다.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나이’, ‘좌동영 우형우’, ‘김영삼 최측근’, ‘최형우 빈소’ 등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가 누구였는지 단순한 직책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젊은 시절엔 4·19혁명에 참여했고 1971년 국회에 입성한 뒤 오랫동안 야당 정치에 몸담았다. 신군부의 탄압과 민주산악회 활동, 김영삼 정부의 요직, 1997년 갑작스러운 투병까지 이어진 삶의 흐름을 차례로 살펴보자.
📌 핵심 요약
별세: 2026년 10월 24일 오전 3시 30분 · 향년 91세
프로필: 1935년 울산 출생 · 부산공고 ·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경력: 6선 국회의원 · 정무제1장관 · 내무부 장관
관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 최측근, ‘좌동영 우형우’
장례: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0호실 · 10월 27일 오전 8시 발인 · 국립4·19민주묘지
1. 별세 소식|2026년 10월 24일 오전 3시 30분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2026년 10월 24일 오전 3시 30분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1세다. 고인의 별세 소식은 오랜 정치적 인연을 맺어온 안경률 전 의원을 통해 전해졌으며, 이날 오전 연합뉴스를 비롯한 주요 언론이 부고를 보도했다. 단순히 전직 장관 한 명의 부고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가 김영삼 전 대통령 곁에서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과 1993년 문민정부 출범을 함께 겪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고인은 신민당·통일민주당 등 야당에서 활동한 뒤 민주자유당과 김영삼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다. 1997년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된 뒤 오랫동안 정치 일선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별세 이후 검색이 몰리는 나이, 고향, 학력, 국회의원 선수, 김영삼과의 관계, 부인과 자녀, 빈소 및 발인 일정을 시간 순서로 정리했다.
이번 부고에서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사망 장소와 실제 조문 장소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임종은 중앙보훈병원에서 맞았지만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잘못된 장소로 방문하지 않도록 구분할 필요가 있다.
2. 최형우 나이·고향·학력·프로필
최형우 전 장관은 1935년 울산 지역에서 태어났다. 당시 행정구역 표기와 현재의 울산광역시 표기는 다르지만 고향은 오늘날의 울산권으로 정리할 수 있다. 부산공업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유년기나 학창 시절에 관해 검증되지 않은 가족 배경을 덧붙이기보다는 공식 부고와 과거 취재로 확인되는 이력을 기준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름의 한자는 崔炯佑이고, 호는 온산(溫山)으로 알려져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가리키는 별칭 YS와 함께 기사에 등장하는 상도동계는 서울 상도동 자택을 중심으로 모인 정치적 측근 그룹을 뜻한다. 최형우가 그 안에서 어떤 위치였는지는 이력만 나열하는 것보다 당대 야당 조직을 살펴봐야 이해하기 쉽다.
| 항목 | 확인된 내용 |
|---|---|
| 이름 | 최형우(崔炯佑) |
| 출생 | 1935년, 울산 지역 |
| 별세 | 2026년 10월 24일 |
| 향년 | 91세 |
| 학교 | 부산공업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
| 호 | 온산(溫山) |
| 주요 경력 | 6선 국회의원, 정무제1장관, 내무부 장관 |
| 정치적 인연 | 김영삼 전 대통령, 상도동계 |
일부 온라인 인명정보의 상세 학력·출생지 표기가 보도 자료와 다를 수 있다. 이 글은 날짜와 인적 사항을 과장하지 않고 공식 보도에서 교차 확인된 범위에 맞췄다.
3. 4·19혁명 학생대표에서 정치 활동까지
1960년 4·19혁명 당시 최형우는 동국대 학생대표로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경험은 그가 이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는 중요한 배경으로 소개된다. 1968년에는 이기택 등과 함께했던 4·19·6·3 범청년운동 조직에서 사무총장을 맡아 3선 개헌 반대 활동에도 참여했다.
4·19혁명은 그 시절 학생·시민의 시위와 이승만 정부 퇴진으로 이어진 현대사의 사건이며, 6·3 항쟁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가리킨다. 두 시기의 활동에 참여한 인사들이 이후 야당 정치와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연결고리를 이뤘다. 최형우 역시 거리의 민주화운동에서 제도권 정치로 활동 영역을 넓혀 갔다.
2023년 4·19혁명 유공자로 인정받았다는 점도 눈에 띈다. 1960년 학생운동 참가와 별개로 보훈 유공자 인정은 훨씬 뒤에 이뤄졌다. 이번 장지가 국립4·19민주묘지로 정해진 배경을 이해할 때 관련이 있는 이력이다. 다만 안장 절차와 법적 요건 전체가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결정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4. 1971년 첫 당선과 6선 국회의원 이력
최형우는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울산·울주 지역에 출마해 처음 당선됐다. 이후 9대와 10대 국회에 진출했고, 신군부 집권기 정치활동의 단절을 거쳐 13·14·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따라서 총선에서 여러 번 당선된 횟수를 합치면 6선이다.
여기서 8대부터 15대까지 연속으로 8번 당선됐다고 이해하면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는 8·9·10대, 13·14·15대에 당선됐으며 중간 11·12대는 포함되지 않는다. 1972년 유신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었고, 1980년 신군부 집권으로 의원직을 잃은 사건까지 함께 살펴봐야 이력의 공백이 이해된다.
울산 지역을 기반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지만, 1988년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부산으로 정치적 기반을 옮겼다. 그 뒤 부산에서 세 번의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직을 이어갔다는 기록도 있다. 지역구를 기준으로 정치 인생을 살펴보면 울산에서 출발해 부산의 야당 조직으로 영역을 확장한 흐름이다.
| 국회 대수 | 의미 |
|---|---|
| 제8대(1971년) | 신민당 소속 첫 국회의원 당선 |
| 제9대·10대 | 유신시대 야당 정치활동 지속 |
| 제11대·12대 | 당선 이력에 포함되지 않음 |
| 제13대·14대·15대 | 부산 기반 의정활동, 최종 6선 |
5. 김영삼 최측근|좌동영 우형우 뜻
최형우의 정치 생애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나오는 표현은 ‘좌동영 우형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었던 김동영 전 정무제1장관과 최형우를 함께 가리키던 별칭이다. 좌우를 지켰다는 표현은 직책의 공식 명칭이 아니라 두 사람의 정치적 역할과 친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말이다.
김영삼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낼 때에도 두 사람은 상도동계의 조직 유지와 야당 활동에 참여했다. 상도동계는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었다. 지도자의 정치적 활동이 제한되거나 야당이 분열될 때 사람과 조직을 연결하고 후보를 뒷받침하는 기능을 했다. 이런 점에서 최형우의 이력은 장관직보다 야당 조직의 실무와 인적 연결을 통해 설명되곤 한다.
김동영 전 장관은 1991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최형우는 1990년대 민주자유당과 김영삼 정부 시기까지 정치권에서 활동했다. 결국 ‘좌동영 우형우’는 두 인물이 같은 시기 동일한 장관직에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YS 곁의 핵심 인사였다는 시대적 표현이다.
6. 신군부 시련과 민주산악회·민추협
1980년 신군부 집권 과정에서 최형우는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당시 군 보안사령부에 여러 차례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은 부고에도 기록돼 있다. 이후 그는 공개적인 제도권 정치활동이 어려운 시기에도 민주화 진영과의 연결을 유지하려 했다.
민주산악회는 1981년 김영삼 전 대통령 측에서 출발한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 활동이 제한된 시절 산행이라는 형태로 인사들이 모이고 교류할 수 있었던 배경을 가진다. 최형우도 민주산악회 활동에 참여했고, 1992년에는 회장을 맡아 조직을 이끈 것으로 전해진다.
또 하나 중요한 조직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다. 최형우는 1985년 간사장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민추협은 김영삼·김대중 계열 인사들의 민주화 협력과 야당 재편 과정에 관계된 단체로, 1980년대 민주화운동사를 설명할 때 빼놓기 어렵다.
1980년대 고문과 탄압 경험을 1997년 질병의 유일한 의학적 원인이라고 쓰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가족이 과거 고문 후유증과 장기간 과로를 원인으로 생각한다는 인터뷰는 존재하지만, 가족의 회고와 의학적으로 확정된 인과관계는 구분해야 한다.
7. 3당 합당 이후 정무장관·내무부 장관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최형우 역시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에서 활동했다. 그전까지 군사정권에 반대하던 인사가 합당으로 여권에 합류한 사실은 당시 정치 지형이 크게 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정무제1장관을 맡았고, 김영삼이 1992년 대선에서 당선된 뒤에는 민주자유당 사무총장과 내무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내무부’는 당시 지방행정과 치안 등 국내 행정 업무를 관장하던 중앙부처의 명칭으로, 현재 정부조직의 특정 장관직과 이름이 같지 않다. 뉴스 제목에 ‘전 내무부 장관’이 들어가는 이유도 이 재임 경력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추진된 공직자 재산공개와 당시 정부·여당의 개혁 과정에서 최형우가 역할을 했다는 보도가 있다. 다만 금융실명제나 군 내 사조직 정비처럼 여러 기관과 인사가 관여한 개혁을 최형우 개인의 단독 성과로 적어서는 안 된다. 정치권의 인사·조직 관리와 부처 운영이라는 실제 보직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 시기 | 활동·직책 |
|---|---|
| 1960년 | 4·19혁명 동국대 학생대표 |
| 1971년 | 제8대 국회의원 첫 당선 |
| 1980년대 | 민주산악회, 민주화추진협의회 활동 |
| 1990년 이후 | 민주자유당 합류, 정무제1장관 |
| 1993년 이후 | 민자당 사무총장, 내무부 장관 |
| 1997년 | 대선주자 거론 중 건강 악화 |
| 2023년 | 4·19혁명 유공자 인정 |
| 2026년 | 김영삼민주센터 명예이사장 추대, 별세 |
8. 1997년 대선주자 거론과 오랜 투병
최형우가 정치적 주목을 크게 받았던 시기 가운데 하나가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때다.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던 무렵 여권에서는 여러 인사가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됐고, 최형우 역시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이는 그가 실제로 대통령선거 본선에 출마했다는 뜻은 아니다.
1997년 3월 11일 건강 이상으로 쓰러진 이후 정치 활동을 사실상 중단했다는 내용은 2016년 가족 인터뷰와 2023년 장기 취재, 2026년 부고에 공통으로 등장한다. 언론에서는 통상 뇌졸중으로 소개해 왔다. 2023년 월간조선 인터뷰에는 독일 진료 과정에서 가족이 전달받은 경동맥박리 관련 설명도 담겼다. 정확한 개인 진료 경과를 공개된 기사만으로 재판정할 수는 없다.
1997년의 정치적 상황과 건강 악화를 연결해 ‘정치적 충격 때문에 쓰러졌다’고 단정하는 주장도 있으나, 구체적인 질병 원인과 정치적 사건 사이의 관계는 검증된 의학적 사실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 확인 가능한 핵심은 대권주자 거론,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 장기간 투병이라는 세 가지 사건이다.
이후 여러 언론은 그가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는 모습을 보도했다.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별세 때는 몸이 불편한 가운데 빈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오랜 정치적 동지 관계를 보여준 장면으로 자주 인용된다.
9. 부인 원영일 여사와 2남 2녀 가족
유족으로는 부인 원영일 여사와 2남 2녀가 있다. 2026년 연합뉴스 부고에 실린 자녀 이름은 최석균·최제완·최은지·최은실이다. 공개 부고에 담기지 않은 자녀의 상세 직업이나 개인 신상, 가족의 재산 규모 등은 근거 없이 덧붙이지 않았다.
원영일 여사는 고인의 오랜 정치 활동과 이후 투병 생활을 함께한 가족으로 보도됐다. 2016년에는 결혼 50주년을 맞아 서울 인사동에서 미술 개인전을 열었고, 몸이 불편한 최형우 전 장관이 전시회에 참석한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당시 전시 제목은 ‘세월의 흔적’이었다.
2023년 월간조선은 가족과 인터뷰하면서 가정에서 이어진 장기간 간병을 자세히 소개했다. 원 여사와 자녀들이 오랫동안 보살폈다는 점은 취재 기록으로 확인되지만, 간병 기간의 모든 상황이나 가족들의 현재 생활을 외부에서 단정할 수는 없다. 이 부고에서는 가족이 확인해 공개한 관계와 과거 인터뷰 내용만 다뤘다.
2026년 4월에는 최형우 전 장관이 김영삼민주센터 명예이사장으로 추대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오랜 정치활동을 마친 뒤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과 관련한 단체에서 그의 역사적 관계를 기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0. 빈소·발인·장지·장례식장 위치
빈소는 서울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0호실이다. 발인은 2026년 10월 27일 화요일 오전 8시로 보도됐고, 장지는 국립4·19민주묘지다. 장례는 대한민국헌정회장, 4·19혁명공로자회장, 민주화추진협의회장 형식으로 치러질 예정이라고 전해졌다.
| 장례 항목 | 안내 |
|---|---|
| 별세 | 2026년 10월 24일 오전 3시 30분 |
| 임종 장소 | 중앙보훈병원 |
| 빈소 |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0호실 |
| 발인 | 2026년 10월 27일 오전 8시 |
| 장지 | 국립4·19민주묘지 |
| 장례식장 전화 | 02-3410-3151 |
| 장례 방식 | 대한민국헌정회장·4·19혁명공로자회장·민주화추진협의회장 |
조문 방문 전에는 현장 안내에 따라 빈소 호실과 입실 가능 시각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좋다. 특히 중앙보훈병원은 별세 장소이고 삼성서울병원은 조문 장소라는 차이를 기억해 두면 혼동을 줄일 수 있다.
국립4·19민주묘지는 4·19혁명 관련 인물들이 안장된 국립묘지다. 최형우가 1960년 혁명에 참여했고 뒤늦게 유공자로 인정받았다는 이력은 이번 장례 보도와도 맞닿아 있다.
자주 묻는 질문 TOP 5
Q1.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언제 별세했나요? 2026년 10월 24일 오전 3시 30분 중앙보훈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91세입니다.
Q2. 김영삼 전 대통령과 어떤 관계였나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 핵심 측근이었습니다. 김동영 전 장관과 함께 ‘좌동영 우형우’로 불릴 만큼 가까운 정치적 동지였습니다.
Q3. 최형우 전 장관은 몇 선 국회의원인가요? 제8·9·10·13·14·15대 국회의원을 지낸 6선 정치인입니다. 제11·12대는 해당 당선 이력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Q4. 부인과 자녀는 누구인가요? 부인 원영일 여사와 2남 2녀가 유족입니다. 부고에 기록된 자녀 이름은 최석균·최제완·최은지·최은실입니다.
Q5. 빈소와 발인 시간, 장지는 어디인가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0호실에 빈소가 마련됐습니다. 발인은 2026년 10월 27일 오전 8시, 장지는 국립4·19민주묘지입니다.
결론|‘좌동영 우형우’로 남은 정치적 동지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별세 소식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화운동 시기와 문민정부 출범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4·19혁명에 참여한 학생대표, 울산에서 첫 배지를 단 야당 정치인, 상도동계의 조직을 지킨 핵심 측근, 6선 의원과 내무부 장관이라는 직함은 서로 다른 시대에 쌓인 한 인물의 이력이다.
정치적 선택과 정책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다만 1960년 4·19혁명 참여, 1971년 첫 당선, 김영삼과의 동행, 1997년 이후 장기간 투병이라는 사실은 고인의 삶을 이해하는 중심축이다. 장례 관련 정보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0호실, 10월 27일 오전 8시 발인, 국립4·19민주묘지 안장 예정으로 정리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최형우 전 장관의 과거 기록사진
아래 사진은 모두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별세 당시의 서로 다른 장면입니다. 이번 2026년 장례식 현장사진이 아닙니다.
자료·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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